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.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,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.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홍준표/정치 경력 (문단 편집) == 정계 입문 == 홍준표는 [[모래시계(드라마)|모래시계]] 검사로 명성을 떨치고, 권력형 비리 등으로 인해 기성 정치인들에게 환멸을 가지게 된 국민들에게 정의롭고 참신한 이미지로 방송에도 출연하는 등 [[정치인]]으로서의 잠재력을 충분히 갖고 있는 상태였다. 정계 입문 과정이 참으로 드라마틱했다. 거듭된 [[좌천]] 인사 끝에 [[대한민국 검찰청|검찰]]에서 나와 [[변호사]] 사무실을 개업하자, [[광주지방검찰청|광주지검]] 시절 잡아넣었던 조폭들이 출소하여 가족을 해치겠다고 위협하였다. 이 때문에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국회의원이 되어 제도권의 보호를 받고자 정치에 입문하게 된 것이다. 처음엔 [[김대중]]으로부터 [[새정치국민회의]] 입당을 제안받아 [[오찬]] 회동에 초청되었으나, '''"[[김대중|DJ]]랑 식사하면 [[새정치국민회의|그쪽]]으로 안 갈 수가 없다더라"'''는 말을 듣고 일단 참석하지 않았다. 밤 늦게 [[노무현]]을 비롯한 [[통합민주당(1995년)|민주당]][* 일명 통합민주당 또는 꼬마민주당. 1995년 [[김대중]]과 [[동교동계]]가 신당인 [[새정치국민회의]]를 창당해 나간 이후 잔류했던 비DJ계 인원들이 재창당한 정당으로, 현재 [[더불어민주당]] 등 민주당계 정당과는 다른 노선의 정당이다. 그렇다고 당시 존재했던 보수정당인 [[신한국당]]이나 [[자유민주연합]]과도 다른 노선을 걷는 등 사실상 제3지대 역할을 하다가, 1997년 [[15대 대선]]을 앞두고 [[신한국당]]과 합당해 [[한나라당]]으로 재출범했으며, 만약 홍준표가 이 때 민주당에 입당했다고 해도 몇 년 뒤 합당 과정을 거쳐 보수정당 소속이 됐을 것이다. 여담이지만 당시 홍준표를 민주당으로 영입하려고 시도했던 [[노무현]]은 훗날 신한국당과의 합당에 반대하고 탈당한 뒤 새정치국민회의로 향한다.] 사람들이 와서 입당 제안을 하기도 했으나, 몇 시간 후 [[강삼재]] 당시 신한국당 사무총장이 찾아와 [[신한국당]] 입당을 권유했고[* 정작 강삼재는 이후 [[제19대 대통령 선거|19대 대선]]에서 [[문재인]]을 지지했다. 사실 문재인 당시 후보와 경희대 법학과 선후배로 이전부터 친분이 두터웠던지라 전혀 이상할 것은 없었지만... 게다가 이 시절에는 문재인은 정치인이 아니었으며, 그가 따르던 김영삼이 건재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보수정당에서 일하던 시절이었다.], 결국 강삼재의 제안을 받아들여 신한국당으로 가게 되었다. 당시 [[김영삼]] 대통령에게서 직접 전화가 와[* 물론 지금이야 당정분리가 이뤄졌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이지만, 참여정부 이전까지는 대통령이 직접 여당 총재를 맡고 인재영입이나 공천에도 관여하던 시절이었다.], '''"[[문민정부]]에서 큰 사람이 왜 야당으로 가려 하는가"'''라는 말을 듣고 결심을 굳혔다고 한다. 홍준표가 노무현의 제안을 끝내 거절하고 신한국당에 들어가게 되자 노무현은 '''"홍검, 그렇게 살면 안 돼요!"'''라고 화를 냈다고. 그 당시 홍준표는 검사 시절에 했던 수사 때문에 온갖 압박에 시달리던 상황인지라, 자신을 확실히 지켜줄 수 있는 당으로 갈 필요가 있었기에 상대적으로 세력이 미약한 [[야당]]의 제안은 거절할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. [[파일:신한국당홍준표.jpg|width=300]] [[김영삼]] 대통령이 직접 전화 통화로 권유하기까지 한 끝에 [[여당]]이자 [[대한민국의 보수정당|보수정당]]에 속하는 신한국당에서 정치 생활을 시작하게 되면서 홍준표도 [[이명박]], [[노무현]][* [[3당 합당]]에 반발하여 DJ 쪽으로 옮겨갔다.], [[이회창]], [[김무성]], [[이인제]], [[이재오]], [[김문수]], [[손학규]], [[박형준]], [[정의화]], [[김영춘]], [[김영선(1960)|김영선]] 등 여러 유력 정치인들과 함께 [[김영삼]]이 발굴해 낸 YS키즈 중 하나가 되었다. [[http://legacy.www.hani.co.kr/section-003000000/2004/02/003000000200402180853001.html|#]] [[https://news.kbs.co.kr/news/view.do?ncd=3758761|당시 뉴스]] 1996년 [[제15대 국회의원 선거]]에 [[송파구|송파]] [[송파구 갑|갑]] [[선거구]]로 출마해 현직 의원인 [[자유민주연합]] [[조순환]] 후보를 이기고 국회에 입성했다. 당시 그는 초선 소장파에 불과했지만, 노동 최저 연령 상향을 발의해 통과시키는 등 초선부터 [[존재감]]을 드러냈다. 그러나 1999년 3월 8일, [[선거법]] 위반으로 국회의원직 상실 위기에 몰리자 대법원 판결을 하루 앞두고 의원직을 자진사퇴한다. 선거운동 당시에 동협의회 총무에게 2,400여만 원의 선거운동비를 주고 사후 허위 지출보고서를 제출한 혐의였다. 이에 대해 당초 검찰은 [[불기소처분]](1996년 10월)을 내렸으나, 야당은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. 곧 이듬해 1997년 2월 21일 법원은 야당 측의 [[재정신청]]을 받아들였고 대법원 판결을 하루 앞 둔 1999년 3월 8일에 국회의원직을 자진사퇴했으며, 이튿날에 대법원은 벌금 500만 원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해 홍준표는 피선거권까지 박탈당하게 되었다. [[http://news.chosun.com/site/data/html_dir/2017/04/05/2017040501830.html|#]] [[파일:hjp.jpg|width=300]] 2000년, [[이회창]] [[한나라당]] 총재는 [[김대중|DJ]]와 영수회담을 갖고, [[추경예산]] 편성과 남북 경협자금을 승인해주는 대신 [[이명박]], [[홍준표]] 등 선거법 위반 사범에 대한 사면에 합의했다. 그 해 광복절 특사 때 사면돼 피선거권을 회복한 그는 2001년 치러진 [[서울특별시]] [[동대문구 을]] [[2001년 재보궐선거|재선거]][* 전임자인 [[김영구(1940)|김영구]] 의원과 2위를 한 [[허인회]] 후보 두 사람 다 위장전입을 한 게 밝혀져서 선거 자체가 무효가 되었다. 김영구 의원은 이론상 재출마가 가능했지만, 결국 불출마로 결론지었고, 변호사 생활을 하던 홍준표에게 다시 기회가 왔다.]에 당선되어 국회로 복귀했다. 독기를 제대로 품은 그는 2002년 [[김대중]] 대통령의 3남 [[김홍걸]]의 미국 은행 입출금 내역을 공개해 3달 동안 23만 달러, 1달 평균 8,700만 원이라는 비정상적인 금액이 인출된 사실을 폭로하였고 검찰이 이에 대해 수사에 들어가게 했다. 곧 검찰은 김홍걸이 최규선에게서 3억 원을 수수한 혐의를 적발했고, 김대중 정권을 뒤흔든 [[최규선|최규선 게이트]]가 터지면서 결국 김홍걸이 구속되었다. 김대중 대통령은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민주당을 탈당했고, [[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]]에서도 참패하면서 [[레임덕]]에 빠지게 되었다.[[http://imnews.imbc.com/20dbnews/history/2002/1887125_19562.html|#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